잡을 수 없는 것들
-도종환-
길을 나서려니 갑자기 거리가 휑해진 느낌이 드는 날이 있다.
나뭇잎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가로수 빈 가지 사이로 먼 산
풍경들이 다 건너다 보이는 그런 날.
그래, 지난밤 거센 바람에 나무들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을지 알 것 같구나,
그런 생각이 드는 아침이 있다.
들에는 잔설이 깔리고 개울에는 살얼음이 얼음이 얼어
이제 가을은 영영 가 버리고 말았구나,
그런 생각이 드는 아침.
눈앞에 시간이 이렇게 가고 있는 걸 바라보면서도 손으로는 붙잡을 수 없어
그저 망연히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아침이 있다.
"피할 수 없는 이별이 가까이 다가옴을 정녕 알면서도
왜 그녀는 그렇게도 선뜻 오고 마는 걸까."
D.H. 로렌스가 겨울을 그렇게 노래했듯이,
피할 수 없는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
속절없이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때가 있다.
아무리 몸부림쳐도 이미 늦어 버린 인연,
그 다해 가는 인연의 시간을 눈으로 바라보면서도
손으로 잡을 수 없어 억장이 무너지는 저녁이 있다.
시드는 꽃을 어떻게 멈춰 세울 수 있는가.
흐르는 강물을 어떻게 붙잡아 둘 수 있는가.
지는 저녁 해를 어떻게 산마루에 매어 둘수 있는가.
가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 주위에 많다.
날아가는 새를 그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어 만들어 낸 것이
겨우 박제에 지나지 않고,
지는 꽃을 가장 아름답게 꽃피던 모습 으로 멈춰 세운것이 조화인 줄 우리는 안다.
하늘을 잃어버린 새와 향기가 없는 꽃을 만든 것,
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.
분명히 사랑한다고 믿었는데
사랑한다고 말한 그 사람도 없고 사랑도 없다.
사랑이 어떻게 사라지고 만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는
시간에도 사랑하는 사람은 점점 멀어져 가고 사랑도 빛을 일어 간다.
시간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은 없으며
날고 때 묻고 시들지 않는 것은 없다.
세월의 달력 한 장을 찢으며 벌써 내가 이런 나이가 되다니, 하고
혼자 중얼거리는 날이 있다.
얼핏 스치는 감출 수 없는 주름 하나를 바라보며 거울에서 눈을 돌리는 때가 있다.
살면서 가장 잡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나 자신이었다.
붙잡아 두지 못해 속절없이 바라보고 있어야 했던 것,
흘러가고 변해 가는 것을 그저 망연히 바라보고 있어야 했던 것이
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늦게 깨닫는 날이 있다.
시간도 사랑도 나뭇잎 하나도 어제의 것은 없다.
모든 것은 늘 흐르고 쉼 없이 변하고 항상 떠나간다.
이 초겨울 아침도,
첫눈도,
그대 사랑도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.
- 좋은생각 2002.01호 -
진짜 좋은글 입니day~~~~